인도 북부 가르왈 히말라야 난다데비(7,817m) 성소의 서쪽 가장자리에
1907년 영국 산악인 롱스태프 일행이 초등한 트리술(7,120m)과 1
939년 스위스의 앙드레 로흐 일행이 초등한 두나기리(7,071m),
그리고 1974년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 일행이 초등한 창가방(6,864m)이 있다.
롱스태프가 처음에 설봉으로 착각할 정도로,
이 상어 이빨 형상의 봉우리는 백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그는 창가방을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고 극찬했다.
이 봉우리는 어떤 산악인이라도 한 번 보고 나면 등정하고 싶어 안달나게 할 만한
전형적인 ‘꿈의 봉우리’이지만 아주 외딴 곳에 위치해 접근이 무척 어렵다.
이 봉우리 정상에서 3개 칼날 능선,
즉 서릉, 남릉, 동릉이 뻗어내리는데,
보닝턴 대는 오버행 때문에 서릉을 포기하고
동릉의 상부 칼날 능선을 말타기 자세로 통과하고 초등에 성공했다.
태스커와 보드만, 사사건건 갈등 빚으며 등반
1975년 영국 산악인 조 태스커는 딕 렌쇼와 두나기리의 신 루트인 남동릉을 등정하고 하산하면서
빙벽과 암벽으로 이루어진 표고차 1,500여m의 수직벽인 창가방 서벽에 매료되어 이 벽을 등반할 결심을 했다.
소규모 등반대가 창가방 서벽의 등반허가를 얻어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태스커의 고위직 인도 친구가 선처해 주었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딕 렌쇼는 두나기리 등반에서 손에 심한 동상을 입어 함께 등반할 수 없었다.
더그 스코트가 참가할 의향을 내비쳤지만,
태스커는 거물급 산악인의 그늘에 묻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대신 피터 보드만을 자일 파트너로 선택했다.
보드만은 십대 때 마터호른 북벽을 등정했고,
대학 재학 시절 힌두쿠시의 코이카아이크봉(5,860m)과 코이몬디(6,233m) 북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초등했고,
1975년 영국대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초등정 당시
셰르파 퍼템바와 함께 2차 공격조로 등반에 성공한, 노련한 산악인이었다.
태스커는 전년도 창가방 서벽 정찰 중에
벽의 가파른 중앙지대에 텐트를 설치할 레지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해먹(hammock·그물침대)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조 태스커가 근무하던 식품회사의 냉동 창고 안에 해먹을 설치하고
3일 밤을 자면서 비박 장비의 미비점을 보완했다.
1976년 8월 두 사람은 15명의 포터와 연락장교 팔타 대위와 함께 창가방 부근의 초원,
해발 4,648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연락장교 팔타는 병을 핑계로 포터들과 함께 델리로 귀환해 버려 두 사람만 첩첩산중에 남게 되었으나,
두 사람은 4시간 거리 위쪽의 서벽 밑 모레인 지대에 전진캠프(5,182m)를 설치하고
6일간 장비와 식량을 운반하며 고소적응 훈련을 마쳤다.
그들은 창가방 서릉으로 이어지는 라마니 능선의 안부에 도착한 다음
능선 끝 지점의 빙벽을 깎아내고 제1캠프(5,486m)를 구축했다.
서벽은 너무 가팔라 알파인 스타일로는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태스커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경험에서 힌트를 얻은 보드만의 제안에 따라
서벽의 중간 높이에 위치한 빙원까지 고정 자일을 설치하려고 했다.
오후마다 먹구름이 몰려와 가루눈, 진눈깨비, 싸락눈을 뿌리면
온 산에서 곧 눈사태가 발생해, 방금 갈아입은 흰옷이 말끔히 벗겨져 내렸다.
그들은 제1캠프에 머물며 영하 20℃ 날씨 속에 루트 개척에 나섰는데,
등반이 너무 어려워 하루 종일 네 피치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선등에 나선 태스커가 복병을 만나 꾸물대기라도 할라치면,
아래쪽에서 보드만이 고함을 질러댔다.
그럴 때면 태스커는 보드만이 등반 강사 출신이어서 등반에 관해 대단히 권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자신의 루트 파인딩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태스커는 보드만이 자신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멋지게 그 피치를 돌파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보드만은,
태스커가 전력투구하지 않는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자신이 직접 등반해 보지도 않은 루트에 대해 섣불리 판단을 내릴 정도로 경솔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위험한 등반의 스트레스로 인해
사사건건 민감한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며 서로 티격태격할 뿐이었다.
창가방 서벽 등반루트 개념도.
보드만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은 휴식 중일 때였다.
그는 자일 꾸러미를 베개 대용으로 활용할 주변머리도 없었고,
텐트의 바깥,
즉 절벽 쪽에서 취침해야 할 순번이 되는 날이면
그가 암벽에 박은 피톤과 연결된 자일로 아무리 안전하게 확보를 했어도
300m 절벽 아래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그는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딴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의 과감한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태스커가 46m 높이의 빙암 혼합 등반지역을 돌파하자 경사 55~65도의 슬랩 지대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76m 위쪽에 창가방 서벽의 제1의 난코스인 오버행 지대가 등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다음날 태스커가 크램폰을 벗고 긴 홈통(크랙)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가파른 바위 크랙에 주먹을 끼워 넣기도 하고
레이백 등반(두 손으로 크랙의 가장자리를 잡아당기고 몸을 뒤로 젖힌 채 두 발로 반대편 암벽에 버티면서 오르는 등반법)을 하면서
자유등반의 멋진 기량을 발휘했다.
등반 난이도는 알프스의 최고 난코스와 비슷했지만
부상을 당하면 구조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달랐다.
보드만이 선등을 교대했고,
태스커는 바위 날개 옆 너비 15cm, 길이 60cm의 비좁은 레지에 서서 확보했다.
보드만은 아이스 해머로 홈통 속의 단단한 얼음을 깨내고 피톤을 설치하며
오버행 쪽으로 서서히 등반을 진행했다.
그가 30m쯤 오르고 갑자기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태스커는 여러 시간 동안 창가방 서벽 등반의 최대의 적인 강풍과 추위와 씨름하며
고독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냈는데,
나중에는 더 이상 생각할 주제가 없었다.
강풍의 방해로 두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태스커가 더 이상 풀어줄 로프가 없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도
바람결에 희미하게 바위 위를 긁는 금속 물체 소리와,
끊겼다 이어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보드만의 음성만 들려왔다.
강풍에 밀려 잠시 엷어진 안개 속에서 오버행 밑의 사람 모습이 보이다 말다 했다.
태스커는 피톤과 암각에 자신을 확보했던 자일마저 풀어 올려 보냈지만 다시 로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다급해진 태스커는 “보드만, 이제 등반을 중단하고 제발 내려와”라고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절규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때 피톤을 힘차게 박는 망치소리가 들려와 안심이 되었다.
한편 위쪽 안개 속에서 등반 중인 보드만은 홈통이 점점 좁아지다가 사라져,
그 위쪽 홀드가 없는 절벽 돌파에 매달렸다.
그는 먼저 두 개의 작은 풋홀드에 조심스럽게 몸을 싣고, 팔을 뻗어 좁은 크랙에 연철 피톤을 꽂은 다음,
손가락 끝으로 톡톡 쳐서 그 피톤을 크랙에 밀어 넣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것을 잡고 다른 손으로 움푹 파인 암벽에 쌓인 눈을 긁어내고,
거기에 손가락을 넣어 구부려 핸드홀드로 삼아 두 발로 암벽을 긁으며 전진했다.
그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거리고 나서
바위 가장자리에 아이스 해머의 구부러진 날을 걸어 당기며 등반한 후,
맨틀셀프 기술(손바닥으로 암반 위를 짚고 오르는 등반법)을 구사해
경사지고 눈 덮인 바위 선반 위로 올라섰다.
그는 그곳을 돌파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싸락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두 개의 피톤을 박아 고정로프를 설치한 후 안개 속에서 태스커의 확보지점으로 내려왔다.
신체적 고통은 정신적 성장에 도움 주는 귀중한 고행
다음날 강풍 속에서 보드만은 고정 자일을 오르다가 바위 날개 뒤쪽에 설치했던 피톤이 빠지면서
가파른 절벽으로 6m의 그네타기 추락을 겪고 혼쭐이 났다.
그들은 제1캠프를 출발한 지 2시간 반 만에 오버행 바로 아래 바위 선반에 도착,
바위 선반을 ‘발코니’라 명명했다.
벽에서 15m 튀어나온 오버행은 직등이 도저히 불가능했고,
그 좌측에도 루트가 전무한 상태였다.
‘발코니’에서 우측으로 오버행을 우회하는 유일한 루트는
여러 개의 바위 루프(지붕)들이 차곡차곡 쌓여 빙원 쪽으로 이어진 대각선 방향의 람페(경사로)였다.
보드만은 발코니 우측 암괴 꼭대기의 크랙에 긴 칼날 피톤을 설치하고 슬링을 걸었다.
그는 그 슬링을 핸드홀드로 이용하며 좁은 람페 속으로 들어섰다.
오버행 아래 그늘진 발코니에서 추위에 떨며 확보를 하던 태스커가 쳐다보니 보드만의 하반신만 바라보였고,
보드만은 등반이 여의치 않자 연거푸 투덜대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보드만의 다리가 태스커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 피톤 박는 망치 소리만 들려왔다.
그늘 속에 있던 태스커는 추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한쪽 발을 뻗어 가까운 양지 쪽에 갖다 대고,
햇볕의 온기가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전도되며
추위에 언 몸을 녹여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열렬히 희구했지만,
그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태스커는 루트 개척의 기쁨을 맛 볼 수도 없거니와,
등반활동으로 추위를 이겨 낼 수도 없는 후등자의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과거 몇 년간 가톨릭 신학대학에 재학한 적이 있는 그는
여전히 구도자의 자세로 ‘인간이 겪는 신체적 고통은 인간의 정신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고행이 되고,
그런 고행이 인간을 개조시킨다’는 수년 전 그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생각으로,
신체적 쾌락을 박탈당한 자신의 고독한 처지를 위로했다.
그는 자취를 감춰버린 동료 보드만이 어떤 난관을 극복 중인지,
또한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잡아먹는지 몹시 궁금했고,
자신이 직접 선등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마침내 올라오라는 보드만의 고함이 들려왔다.
한편 발코니를 떠난 보드만은 람페의 첫 번째 바위지붕 꼭대기의 크랙에 긴 칼날 피톤을 설치하고,
거기에 줄사다리를 걸었다.
그는 줄사다리를 밟고 바위 지붕 가장자리를 따라 올라,
오버행의 작은 벽감(오목하게 패인 부분)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추락하지 않으려고 두 무릎을 한쪽 벽에,
등을 다른쪽 벽에 단단히 붙이고 휴식을 취했다.
5m 아래쪽 발코니에서 확보하고 있던 태스커의 머리와 상체는 오버행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고,
오직 그의 발만 내려다보였다.
보드만은 휴식을 취한 후 오버행의 벽감 속에서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그의 머리 위쪽 오버행 끝에 피톤을 박고 슬링을 걸어 자일을 통과시켰다.
그는 흔들리는 그 오버행 바위와 함께 굴러 떨어질까봐 겁이 났다.
30cm 넓이의 람페 속에 백색 얼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는 오버행 끝을 통과하는 자일에 매달려 람페 속의 단단한 얼음을 깎아내고,
람페 벽에 피톤을 설치하고 거기에 자일을 통과시켰다.
람페 속에 2개의 피톤을 더 설치하며 전진하자,
1m 높이의 오버행이 다시 람페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는 람페에 한쪽 발을, 암벽에 다른쪽 발을 대고, 위쪽의 람페로 올라섰다.
그는 람페 속 빙벽에 아이스 해머의 구부러진 날을 박고, 거기에 줄사다리를 걸었다.
그것을 발판으로 아이스 해머 위쪽의 얼음에 10cm 깊이로 아이스 스크류를 박고 전진했다.
그 날 그는 암벽에서 최초의 풋홀드를 발견하고 감격했다.
강추위 속에서 때로는 차가운 암벽을 부둥켜안기도 했지만,
2시간 동안의 곡예 등반은 그의 몸을 땀투성이로 만들었다.
그가 진행하고 있던 루트의 15m 위쪽에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한,
벽에서 분리된 거대한 암괴인 바위날개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들이 전에 벽을 정찰하면서‘기요틴(Guillotine·단두대)’이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 바윗덩어리였다.
보드만은 그곳으로 직등하다가는 압사당할 위험이 있음을 직감하고,
우측 암벽으로 5m 트래버스한 후 전진했다.
바위가 잘 부서지는 지대여서 피톤을 견고하게 설치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드디어 그는 2피치의 얼음 람페 전 구간을 돌파하고 나서,
해머로 좁은 크랙에 구멍을 파고 너트(nut)를 박아 자일을 통과시키고,
발코니에서 3시간 동안 확보하고 있던 태스커를 불러 올렸다.
태스커는 23kg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오버행 우회구간의 구불구불한 고정 자일을 따라 몸을 뒤틀면서
매우 서투른 동작으로 헐떡대며 어렵사리 얼음 람페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태스커는 보드만이 뛰어난 등반기량과 불굴의 용기로 난코스를 개척했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꼈지만,
빙원으로 이어지는 중요 루트가 돌파된 것에 대해 무척 기뻐하며 “참 잘했어, 친구”라고 찬사의 말을 전했다.
따가운 햇살과 높은 고도,
그리고 탈진상태는 사람의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지만,
어떤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았다.
보드만이 암벽의 홈통을 오르다가 홈통이 사라지자, 6m를 인공 보조 등반으로 직등했다.
그가 빙원에서 암벽 위로 뻗어내린 거대한 고드름과 나란히 돌출한 바위 립(rib)을 등반 중에 낙조가 암벽을 물들였다.
그가 피톤을 박아 자일을 걸고 태스커가 있던 곳으로 하강할 때,
안개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태스커가 보드만에게 말했다.
“이 오버행 우회 루트는 진짜 ‘토니 쿠르츠’ 피치야.”
토니 쿠르츠는 독일 클라이머로 1936년 아이거 북벽에서 오버행 피치 때문에 생환하지 못했는데,
오버행 난코스를 돌파한 보드만의 등반기량을 칭찬하는 뜻으로 한 말이다.
다음날 무거운 짐을 짊어진 태스커는 ‘토니 쿠르츠 피치’ 끝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현수교 골든게이트브리지(금문교)의 버팀 줄처럼 휘어 늘어진 고정 자일을 무사히 건넜다.
그들의 머리 6m 위쪽에 빙원에서 뻗어 내린 거대한 고드름이 암벽의 작은 걸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5m의 벽을 오르고 크랙이 사라지자,
보드만은 크랙의 맨 위쪽에 피톤을 설치하고 자일을 건 다음,
바위 날개 뒤에 또 하나의 피톤을 거꾸로 박아 자일을 통과시킨 후
몸을 좌측으로 기울이며 우측 고드름 쪽으로 텐션 트래버스(Tension traverse, 자일을 잡고 행하는 트래버스)를 했다.
그는 고드름에 아이스 액스와 아이스 해머를 깊이 박고 나서, 프런트 포인팅으로 빙벽등반을 계속했다.
그는 얕은 아이스 걸리 등반 중에 레지를 발견하고,
거기서 확보를 하여 태스커를 올라오게 했다.
태스커는 토니 쿠르츠 피치 끝에서부터 중간 확보물을 모두 회수하며 올라 왔기 때문에,
그들은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기요틴 옆 오버행 바위까지 일직선으로 자일 하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앞에 150여 m 높이의 빙원이 상부 암탑 지대 밑까지 뻗어 있었다.
태스커가 빙원을 50m쯤 오르면서,
자신이 아이거 북벽의 ‘화이트 스파이더(하얀 거미)’를 등반할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
즉 신비의 장소에 들어간 기분을 맛보았다.
그는 몇 개의 피톤을 설치하고 보드만에게로 자일 하강했다.
그들이 하산할 때 건너다보이는 피라미드 두나기리봉의 남동릉 위에 걸쳐 있던 깃털 구름을 낙조가 붉게 물들이자,
그 능선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듯 붉게 타올라 장관이 연출되었다.
먼저 하산하던 태스커는 자신이 전년도 개척했던 그 능선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드만은 필름을 갈아 끼우면서 실수로
지난 이틀간 촬영했던 필림통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애석하게도
그가 토니 쿠르츠 피치 등반 중에 찍었던 사진은 모두 절벽 아래로 날아가 버렸다.
강풍에 흔들리는 침낭 속에서 악몽같은 밤 되풀이
다음날 태스커는 가파른 빙원의 견고한 청빙을 프런트 포인팅으로 오르다가
너무 힘겨워 빙원의 왼쪽 가장자리의 암벽 지대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는 바위 주름을 이용해 베르글라가 덮인 미끄러운 바위 슬랩을 돌파하고,
30m 높이의 빙벽을 더 올라 빙원의 위쪽 가장자리,
즉 창가방 서벽의 제2의 난코스인 ‘상부 암탑’지대의 밑에 도달했다.
그들은 지난 1주일 동안 제1캠프에서 빙원 상부까지 610m의 고정자일을 깔았다.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보드만이 전날 고역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고산병의 증세마저 느끼며
가파른 빙원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비틀거렸다.
그가 발걸음마다 투지를 불사르며 악몽 같은 고투를 계속할 때
태스커가 위쪽에서 등반 중인 보드만을 자일로 끌어올려 주었다.
보드만이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 쉴 때마다
태스커가 그의 지친 모습을 촬영하느라 연속적으로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드만은 전에 맨체스터의 친구들한테서 태스커가 두나기리 등반 보고강연을 하면서
자일 파트너 딕 렌쇼가 탈진 상태로 정상능선에서 쓰러진 모습이 담긴 슬라이드를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태스커가 혹시 자신을 리드하며 창가방을 등반했다고 허세를 부리려는 속셈으로 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자,
보드만은 화를 벌컥 내면서 “또 다시 그따위 사진을 찍으면 흠씬 두들겨 패 줄 거야”라고 고함쳤다.
보드만도 전에 태스커의 후등 장면을 촬영했으면서,
자신의 후등 장면이 촬영된다고 유치하게 화를 발끈 내는 이유가 뭘까?
태스커는 보드만이 자신의 지친 모습의 후등 장면이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자의 이미지가 손상될까 염려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든 식량과 가스통, 피톤을 초록색 비박 색에 넣어 앵커에 매달아 두고 하산을 시작했다.
보드만은 빙원 밑에서 출발해 기요틴(단두대) 위쪽을 지나 토니 쿠르츠 피치를 자일 하강하면서
등반기술 책에 기술된 ‘과거에 여러 명의 위대한 산악인들이 자일 하강 중에 목숨을 잃었다’는 문구를 떠올리며
아주 조심스럽게 하강했다.
그들이 제1 캠프에서 취침할 때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다음날도 눈이 내리고 강풍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고, 식량과 해먹을 가지러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그들이 다음날 등반을 재개해 제1캠프를 지나자,
검은 구름과 폭설을 동반한 시속 80km의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더 이상 등반이 불가능해지자
각자 생존전략으로 암벽의 고정 자일에 해먹을 설치하고,
강풍에 심하게 흔들리는 해먹 속의 침낭으로 한참 만에 기어들었다.
태스커의 해먹은 3m 위쪽에 있었고,
그 아래쪽에 커다란 바위 날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태스커는 취침 중에 낙빙이나 낙석이 해먹을 매단 자일을 끊어 버리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자신은 추락하지 않고 바위 날개에 걸리게 될 것이라고 안심했다.
태스커는 해먹 속의 불편함을 잊으려고 수면제를 복용했지만,
몇 시간 후 강풍과 추위로 잠이 깨었다.
강풍으로 인해 침낭의 어떤 작은 틈새로도 눈가루가 스며들어 생지옥이 연출되었다.
그들은 다음날 오전 10시에 등반을 재개했다.
보드만은 해먹 밖의 강풍 속에서
등산화를 착용하다가 손이 새파랗게 변하고 손가락이 마비되었다.
그들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저녁 무렵 빙원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폭풍이 다시 시작되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소나기처럼 퍼붓는 싸락눈이
모든 핸드홀드와 폿홀드를 덮어버려 전진이 불가능해 다시 해먹을 설치하고 비박했다.
그들은 강풍에 흔들리는 침낭 속에서 스토브를 작동시킬 수 없어서 탈수와 굶주림,
그리고 강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악몽 같은 밤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텐트 같은 아늑한 공간은 바라지도 않았고
단지 앉아서 난로를 피울 수 있는 공간만이라도 찾아낼 수 있기를 갈망했다.
진수성찬을 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따뜻한 음료를 갈구했다.
이튿날 그들은 악천후 속에서 빙원 위쪽으로 46m를 더 전진해
빙벽을 깎아내고 해먹을 설치해 세 번째로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다음날도 폭풍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극심한 체력 소모로 등반이 불가능해 다시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한 후,
두 사람은 해먹의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빙원 상부에 제2캠프를 구축하기로 했다.
그들은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전진 캠프에서 텐트 내피만 휴대하고 등반을 재개했다.
그들은 상부 암탑 지대에 설치할 고정 자일을 확보하기 위해
오버행 밑 발코니 아래쪽에 설치했던 고정 자일 6동을 철거해 운반했다.
그러나 토니 쿠르츠 피치에 설치한 고정 자일 2동은 철거하지 않았다.
그것을 철거하면 1936년 아이거 북벽의 힌터스토이서 트래버스의 자일 철거의 재판(再版)이 되어,
퇴로가 차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빙원의 상부 6,100m 부근에 텐트를 설치할 레지를 만들기 위해 아이스 액스로 빙벽의 옆구리를 깎아냈다.
고소에서의 그 작업은 숨이 차고 팔에 경련이 일어나는 중노동이었다.
얼음 밑에 바위 슬랩이 있어서 깊이 팔 수도 없었다.
그들이 텐트를 설치하자, 텐트 바닥 일부는 허공에 매달린 상태여서
강풍을 이겨낼 수 있도록 빙벽과 암벽에 피톤을 박고 자일로 단단히 묶었다.
그들은 취침 중의 추락을 예방하기 위해 암벽에 설치한 피톤과 연결된 자일로 몸을 묶고 텐트 속에 들었다.
그들은 제2캠프에 4일간 머물면서 상부 암탑 지대에 도합 9피치, 360여m의 고정 자일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다음날 아침 보드만은 바위 홈통 속의 얼음에 아이스 피톤을 박고 나일론 슬링을 걸어 홀드로 삼으며 등반을 계속했다.
그는 좁아지는 홈통의 양쪽 암벽에 양다리를 걸치며 등반해 홈통 꼭대기에 2m 튀어나온 오버행을 돌파했다.
창가방 서벽과 북벽 사이에 걸쳐 있는 상부 암탑의 좌측 가장자리,
즉 북벽에 높이 60m의 얼음이 들어찬 수직 홈통이 있는데,
그들은 그곳에 벽감(壁龕·Niche)이란 이름을 붙였다.
보드만이 벽감을 루트로 선택하려고 가까이서 자세히 정찰해 보니 등반 불가로 판단되었고,
벽감 위쪽의 북벽도 오버행으로 보였다.
보드만은 어쩔 수 없이 상부 암탑의 우측, 즉 서벽의 높이 5m짜리 바깥으로 기울어진 크랙을 레이백으로 절반쯤 오르자,
손가락의 힘이 풀려 크랙의 가장자리를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다.
그는 크랙 속의 좁은 틈에 핸드 재밍을 하고,
팔을 크랙 속의 벽에 밀착시켜 제동을 걸고 매달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레이백으로 나머지 크랙을 올라,
이어지는 화강암 아레트의 흔들거리는 가장자리를 겁없이 손가락으로 거머쥐고 몸을 끌어올려 풋홀드를 확보했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고 구토를 참으며 암벽에 피톤을 박아 고정 자일을 설치하고 태스커를 불러 올렸다.
보드만이 방금 돌파한 이 화강암 크랙 루트는 두 번 다시 오르고 싶지 않은 난코스였다.
엉금엉금 기어 정상부 도착 후 환각 속에 탈출
선등을 맡은 태스커는 여러 개의 암각에 슬링을 걸어 중간 확보물을 설치하며,
오버행 밑에 있는 대각선 방향의 우측 바위 선반을 지났다.
그는 빙벽에 얼어붙은 즐비한 암각들을 발판으로 삼으며 가파른 빙벽의 얼음 러넬(runnel·좁은 수로)에 양다리를 걸치며 올라,
경사도가 완만한 암벽에 도달했다. 그는 상부 암탑의 가장자리를 따라 오른 후
왼쪽으로 트래버스해 높이 90m의 거대한 오버행 홈통 밑에서 보드만을 불러 올렸다.
그들은 그 홈통을 큰 홈통(Big Groove)이라고 명명했다.
큰 홈통은 맨 꼭대기의 오버행 때문에 등반이 불가능했고,
우측 150여 m의 높이로 치솟은 암벽은 오버행들이 쌓여 층계를 이루고 있었지만 홀드도 없고 크랙도 없었다.
태스커가 큰 홈통 밑 좌측으로 트래버스해 북벽의 빙암지대에 위치한 얼음이 들어찬 코너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크랙에 2.5cm 깊이로 박히는 칼날 피톤에 매달리기도 하고, 빙벽에 아이스 액스를 박아 풋홀드로 삼기도 했다.
그는 암벽등반과 빙벽등반을 번갈아 하며 올라,
위쪽 볼더(boulder·둥근 돌)에 도달해 고정자일을 설치하고 보드만을 불러 올렸다.
태스커는 20여m의 가파른 빙벽을 더 오르고 두 개의 아이스 피톤을 박아 고정자일을 설치하고 하강했다.
그가 2시간 동안 사력을 다해 돌파한 창가방 북벽의 우회 피치는 최고 난코스였다.
창가방 서벽 전경.
다음날 태스커는 부족한 고정 자일을 보충하기 위해 빙원에 설치했던 고정 자일 3동을 철거해 운반했고,
보드만은 전날 지그재그로 설치된 3동의 자일을 일직선으로 재배치해 일부의 자일을 확보했다.
그는 전날의 최고 도달지점에서 크랙을 따라 북벽을 가로질러
프런트 포인팅으로 우측 상부 암탑 옆의 거대한 바위날개에 도달한 다음, 그것을 타고 넘었다.
그는 상부 암탑 좌측의 버트레스에 붙어 큰 홈통 꼭대기에 도달한 후,
그 위쪽의 크랙에 3개의 피톤을 설치하고, 태스커를 올라오게 했다.
그는 두 개의 크랙과 한 개의 홈통을 이용하며,
벽에 붙은 파리 신세로 전락해 수직벽과 오버행 벽을 돌파하고,
정상으로 이어지는 스노 람페가 바라보이는 지점까지 진출한 후 피톤을 설치하고 하산했다.
다음날 태스커는 큰 홈통 밑에 있는 앵커에서부터 좌측 북벽의 트래버스 구간과
큰 홈통 위쪽의 3개 피톤을 설치한 크랙까지 중간 확보물을 모두 회수하고,
120m 길이의 고정 자일을 줄넘기를 돌리듯이 큰 홈통 속으로 넘긴 후,
위쪽으로 끌어 당겨 고정시켰다.
그러니까 뒤따르던 보드만은 북벽으로 다시 트래버스할 필요 없이
큰 홈통 속을 통과하는 재설치된 고정자일로 직등했는데,
고정 자일에 마모된 곳이 없는지 유심히 살폈다.
태스커는 전날의 최고 도달 지점 위쪽에서 슬랩의 바위날개를 이용해 가파른 아레트에 붙었다.
그가 오버행 홈통에 도달하려고
홀드 없는 벽 위로 밀어올린 왼손과 발은 계속 미끄러져 내리며 꼭두각시놀음 동작을 연출했다.
그럴 때마다 확보 자일이 날카로운 암각 위를 오르내리며 마모되고 있어서,
그가 홈통에 도달하기 전에 끊어질 것 같았다.
그는 끝에 알루미늄 쐐기가 매달린 슬링을 홈통(크랙) 쪽으로 던져 넣어 크랙에 걸리게 한 후,
슬링을 잡고 올라 오버행 홈통에 피톤을 설치했다.
그는 위쪽의 화강암 암괴까지 프리클라이밍으로 오르고,
거기서 시작되는 높이 60m의 코너를 돌파했다.
그는 코너 위쪽 오버행에 피톤을 설치한 후 보드만을 올라오게 했다.
태스커는 한 시간 동안 등반 후
그 오버행 좌측의 상부 암탑의 꼭대기에 도달해 날이 저물자 급히 제2캠프로 하산했는데,
어둠 속에서 큰 홈통 위쪽 크랙을 자일하강하다가 추락 위기를 겪기도 했다.
뒤처진 보드만이 상부 암탑 위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스노 람페 쪽을 정찰하니
암벽에 30m 높이의 홈통이 스노 람페 초입으로 이어지고 그 위에 오버행이 걸려 있었다.
10월 13일 그들은 제2캠프에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했다.
출입구 멀리 티베트의 갈색 평원 위로 시바신(神)의 옥좌, 카일라스 설봉이 바라보였다.
그들은 장엄한 파노라마를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낮잠도 잤다.
기침할 때마다 각혈을 하는 태스커가 황홀한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보드만이 의아해서 물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가?”
태스커가 대답했다.
“자네 텐트 천을 어루만져 본 적 있나?
내 친구 얘기에 의하면 텐트 천은 여성 팬티와 같은 소재를 사용해서 아주 매끄러운 촉감이래.”
욕망 충족의 길이 차단된 원시 환경 속에서 젊은 사내는 상상으로나마 위안을 찾고자 애쓰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텐트를 스치는 시속 80km의 바람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은 상부 암탑의 정상 위쪽 ‘모세의 바닷길’ 같은
홈통 상부를 가로지르는 오버행 암괴 밑에 있는 구멍을 ‘열쇠 구멍’이라고 명명하고,
그곳을 빠져나가 킥스텝으로 스노 람페를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은 300m 위쪽에 있었다.
스노 람페에서 태스커가 좌측 바위 버트레스에 위치한 엑시트 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걸리를 이용해 직등하면, 등정 후 빠른 속도로 자일 하강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즉시 루트를 변경했다.
그러나 그들이 엑시트 걸리의 난이도를 오판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결과 엄청나게 큰 시련이 뒤따랐다.
태스커가 경사도 60도의 암빙 구간을 선등한 후
보드만은 브리징(bridging), 재밍, 침닝(chimneying), 레이배킹(lay-backing),
맨틀셀핑, 핑거 풀스(finger pulls), 프레서 홀드(pressure holds) 등,
온갖 등반기술을 구사하며 뛰어난 암벽등반과 빙벽등반으로
엑시트 걸리의 나머지 구간을 돌파하고 기진맥진했다.
그들이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사면 아래 6,706m 지점에 도달했을 때 날이 저물었다.
아직도 정상은 150여m 위쪽에 있었다.
그들은 설동을 파려고 시도했지만 적설량이 많지 않아 실패하고,
레지에 앉아 비박색과 침낭을 뒤집어쓰고 추위에 떨며 고통의 밤을 보냈다.
다음날 그들은 자일을 묶고 태스커가 앞장서서 정상으로 향했다.
그들은 나중에 탈진상태가 되어 두 팔과 두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서 정상 부근에 도달했다.
정상은 반대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는 뾰족한 얼음 등성이였다.
그들은 15m쯤 떨어진, 좀 더 높아 보이는 지점까지 올라갔다.
보드만이 몽매간에 그리던 난다데비(7,817m)가
최초로 잠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가 구름 속으로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스노 람페 아래의 고정자일로 되돌아왔을 때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태스커가 먼저 자일 하강해 텐트에서 음료수를 준비했다.
그가 아무리 기다려도 보드만이 나타나지 않았다.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보드만이 마침내 돌아와
“자네, 저 불빛이 보이지?”라고 느닷없이 헛소리를 했다.
태스커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드만이 이어서 말했다.
“아, 그 불빛은 사라졌구나. 저 사람 목소리는 들리나?”
보드만이 다시 헛소리를 했다.
태스커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보드만이 탈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정신착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태스커가 천천히 말했다.
“자네는 오랜 시간 동안 캠프로 귀환하지 않았어.
나는 자네가 추락한 줄 알고 상당히 걱정했어.”
그 때서야 제정신이 든 보드만이 대답했다.
“자일 하강 중 피톤 한 개가 빠졌어.
하마터면 추락해 목숨을 잃을 뻔했지.
겨우 한 손으로 재빨리 고정로프를 잡고 거꾸로 매달렸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어.”
다음날 그들이 늦게 출발해 제1캠프에서 150여m 위쪽 지점, 암빙 혼합 구역에 도달했을 때 어둠이 깃들었다.
추위, 강풍, 피로가 고통을 가중시켜, 그들은 명료한 생각을 해낼 수 없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등로 표시와 앵커를 찾아 내지 못해 엉뚱한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밤눈이 밝은 보드만이 태스커의 확보를 받으며 30m를 내려가 마침내 올바른 루트를 찾아냈다.
그들은 다음날 늦게야 전진캠프로 귀환했다.
보닝턴,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극찬
영국 산악인 크리스 보닝턴과 당시 영국의 산악회장 롱랜드는,
보드만과 태스커의 창가방 서벽 등정을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위대한 등반 업적이라고 극찬했다.
물론 1976년에 내린 이 평가는 라인홀트 메스너-하벨러 조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
메스너의 낭가파르바트 루팔벽과 에베레스트 북벽 단독등정,
예지 쿠쿠츠카와 피트로프스키의 K2 남벽 등정 등 뛰어난 등반업적이 성취되기 이전이었다.
또한 스페인의 루카스와 보히가스 조가 안나푸르나 남벽의 신 루트를 알파인 스타일로 돌파하고 중앙봉을 등정했고,
이어서 폴란드의 쿠르티카와 오스트리아 로베르 샤우어 조가 알파인 스타일로 가셔브룸4봉 서벽을,
스위스 로레탄-트루아예 조가 에베레스트 북벽 혼바인 쿨와르 직등 루트를 최단시간 내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했다.
또한 영국의 베나블즈 외 3명이 에베레스트 캉슝벽(동벽)을 돌파하고
사우스 콜에 도달한 후 베나블즈 혼자 등정했고,
미국의 제프 로와 프랑스의 여성 산악인 카트리느 데스티벨 조가
카라코람 트랑고 타워 유고 루트를 자유등반으로 등정하는 등,
수많은 위대한 업적이 이룩되기 이전이었다.
1982년 영국 산악인 피터 보드만과 조 태스커가 에베레스트 북동릉의 미등구간을 등반 중에 실종되었다.
1992년 카자흐스탄-일본 합동 등반대원들이 북동 숄더 아래쪽 제2 피너클 측면의 눈 속에서
잠자는 자세의 보드만 주검을 발견했으나 태스커의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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