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에 위치한 카라코람산맥의 ‘카라코람’이라는 말은
티베트어로 ‘검은 바위’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이 산맥에는 수많은 적갈색 암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마천루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이 산맥의 서쪽 끝에 세계 제2의 고봉 K2(8,611m) 가 자리 잡고 있다.
K2의 ‘K’는 카라코람(Karakoram)의 약자이고, ‘2’는 측량 일련번호이다.
1892년 영국인 마틴 콘웨이의 탐험으로 이 지역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909년 이탈리아의 아브루치 공(公)이 이끄는 원정대가 K2의 가파른 남동릉 상의 6,250m 지점까지 진출했다가
악천후를 만나 퇴각하며 이 산을 ‘등반 불가’로 판정했다.
그러나 1938년 찰스 휴스턴 대장의 미국 제1차 K2 등반대가 이 산에서 최초로 괄목할 만한 등반업적을 이룩했다.
찰스 휴스턴 대장은 미국 하버드대학 산악부 출신으로
1936년 영국 산악인 오델과 공동으로 가르왈 히말라야의 난다데비(7,816m) 등반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 자신도 남벽으로 정상 아래 300m 지점까지 진출한 경력이 있다.
그는 1950년 틸만 등과 네팔의 쿰부 아이스 폴 밑까지 진출해 다음해 영국 에릭 십튼 정찰대의 길을 터놓았다.
날로 기량 향상되는 현지인들과 캠프3까지 짐 운반
빌 하우스 대원이 K2 남동릉 상의 제1 난코스인 경사도 80도, 높이 30여m의 좁은 침니를 최초로 돌파해,
오늘날 이 침니는 ‘하우스 침니’라고 불린다.
대원들은 제2 난코스인 일련의 거대한 바위스텝,
즉 7,400m 지점에 위치한 ‘블랙 피라미드’를 돌파하고,
숄더(Shoulder) 위쪽 설원의 7,925m 지점까지 진출했는데,
악천후와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다 잡아 놓은 토끼를 놓치고 말았다.
1939년 프리츠 비스너가 이끄는 미국의 제2차 K2 등반대는
이탈리아 아브루치 공을 기념해 K2 남동릉 상의 단속적(斷續的)인 몇 개의 작은 능선들과 슬랩,
암탑들로 이루어진 루트를 ‘아브루치’ 능선으로 명명했다.
비스너 대장과 셰르파 파상 다와는 무산소로 이 능선의 상부 8,382m 지점까지 진출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캠프7에 혼자 체류하던 미국의 백만장자 두들리 울프 대원의 구조를 시도하던 3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불귀의 객이 되어,
K2에서 최초로 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등반이 끝나고 말았다.
1953년 찰스 휴스턴은 또 다시 미국 제3차 K2 등반대를 이끌었다.
부등반대장은 22년간의 알래스카와 알프스의 등반경력을 지녔고
1938년의 휴스턴 대에도 참가했던 로버트 베이트스가 맡았다.
27세의 물리학자 조지 벨, 26세의 지질학자 아트 길키,
또 한 명의 지질학자 디 모울나르, 시애틀 출신의 산악인 피트 쇼닝,
28세의 철학과 대학원생 봅 크레이그, 이렇게 5명이 대원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로키산맥, 시에라네바다, 북미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남미의 페루 안데스 등지에서
다년간 등반경력을 쌓은 베테랑 산악인들이었다.
또한 베이스캠프까지 포터들 관리와 수송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현지 언어에 능통한 영국군 대위 토니 스트리더가 선발되었다.
등반대는 스카르두에 집결해 포터들을 선발하고 짐을 꾸렸다.
그들은 계곡 양쪽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암탑들과
그 밑으로 격류가 노호하는 계곡 속으로 200km 거리가 넘는 대장정인 캐러밴을 시작했는데,
구간에 따라 목숨을 담보로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1938년과 1939년 두 차례 미국 등반대가 이용했던 옛날 강둑 길의 중간이 끊겨,
그들 일행 175명은 ‘자크(zak)’라는 이름의 염소 가죽으로 만든 뗏목을 이용해
폭이 90m가 넘는 깊은 급류의 브랄두(Braldu)강을 이틀 만에 모두 건넜다.
그들은 계곡 위쪽에서 악명 높은, 공포의 ‘로프’ 다리를 이용해 또 다시 강을 건너는 고행을 감수해야 했다.
그들은 최종 마을인 아스콜에 못 미친 지점의 천연 노천 온천에서 오랜만에 목욕하는 호강도 누렸다.
세계 최대 빙하의 하나인 발토로 빙하를 덮고 있던 바위, 모래, 자갈도 빙하 이동과 함께 끊임없이 위치를 변경해,
길도 없는 이곳을 통과하는 데 5일씩이나 걸렸다.
그들이 발토로 빙하와 고드윈 오스틴 빙하가 만나는 지점의 모퉁이에 도달했을 때,
K2의 상부를 가려버린 커다란 구름 띠와 정상에서 강풍이 토해내는 깃털 모양의 눈가루 때문에 K2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 날 오후 늦은 시각에 해발 5,029m 지점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새 폭설이 내려,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운반한 후
바위 밑에 들쥐들처럼 옹기종기 한데 모여 앉아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밤을 보낸 발티 포터들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다음날 날이 맑게 개어 북쪽을 제외한 3면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진면목을 드러냈다.
남쪽에 아름다운 초골리사(7,620m)봉이 새색시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동쪽으로 스컁캉리(Skyang Kangri)의 계단이 바라보였다.
서쪽 사보이아빙하 위쪽으로 무명 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쪽으로 K2 정상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휴스턴 대장과 3명의 대원들이 포터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짐 상자를 열어 짐을 정리하는 동안 베이트스와 길키 두 사람은 빙하 위쪽 빙탑들 사이로 전진해
아브루치 능선 아래 해발 5,395m 지점에서 안전한 캠프1 후보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다음 3일 동안 매일같이 8명의 등반대원과 6명의 훈자 포터들은 각자 대략 18kg의 짐을 캠프1으로 운반했다.
신설 위에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은 복사열을 내뿜어 빙하 위의 공기를 화덕 속처럼 달구어 놓았다.
그들이 운반하는 짐은 그다지 무겁지 않았지만, 아직 고소적응이 되지 않은 대원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광포한 폭풍이 K2 등정에 대한 확신 깨뜨려
K2의 남동릉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능선 상에 두서너 동의 텐트를 설치할 캠프지를 찾아내기가 수월치 않아 보였다.
그들의 계획은 남동릉 상의 해발 7,772m 지점에 캠프8를 구축해 4명의 지원조를 투입하고,
해발 8,230m 지점에 최종 캠프9을 구축하고 2명의 공격조를 투입할 작정이었다.
6월 29일까지 캠프2(5,883m)가 구축되었고, 난코스 구간에 고정 자일이 설치되었다.
이틀 후 길키와 크레이그, 휴스턴 세 사람은 캠프2로 진출했고,
다른 대원들과 훈자 포터들은 짐을 운반했다.
선발대는 5일간 고정 자일을 설치하며 전진해 낙석 위험이 없는 안전한 장소에 캠프3(6,309m)를 구축했다.
그들은 애당초 훈자 포터들에게 캠프2까지만 짐 운반을 시킬 계획이었으나,
훈자 포터들은 고산 등반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설벽, 빙벽을 잘 등반했다.
날마다 그들의 등반기량이 향상되어, 대원들과 셰르파들이 서로 자일 파트너가 되어 캠프3까지 짐을 운반하게 되었다.
7월 10일 밤 최초로 사나운 폭풍설이 그들을 강타해 눈보라가 그들의 텐트 속까지 파고들었다.
다음날 해가 뜨자 폭풍설은 그쳤으나, 신설이 덮인 암벽은 등반이 더 어렵고 위험했다.
벨과 모울나르 대원이 약간 오버행 암탑을 돌파하고 캠프4(6,553m)까지 진출했다.
그들이 얼음이 덮인 암벽으로 등반을 지속할 때 날마다 기상 상태가 악화되어,
혹한 속에서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이전에 몬순이 카라코람 지방까지 침투한 경우가 없는데도
유달리 그 해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초원에 생명수를 실어 나르는 비구름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수분을 거기서 다 토해내지 못하고
여분의 수분을 폭설로 바꾸어 K2에 퍼부으며 미국 대에게 위협을 가했고,
실망과 패배와 종국에는 비극까지 안겨 주었다.
등반대가 고도를 높일수록 지세가 더욱 험난해졌고 추위와 강풍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미국식 사고방식대로
등반은 어디까지나 스포츠에 불과하고 사활이 걸린 도전은 아니라는 신념이 확고했기 때문에,
무모한 도전은 가급적 피하고 모든 등반계획이 상황에 따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수정되었다.
그들은 캠프마다 충분한 식량을 비축해 두고 풍부한 안전등반 경험을 바탕으로,
철저한 대비로 위험을 최소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빙사면에 강열한 땡볕이 비치면 얼음이 녹으며 얼어붙어 있던 작은 돌이나 큰 바위가 떨어져 나와
예기치 않은 낙석이 되어 그들에게 폭격을 가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7월 14일 또 한 번의 사나운 폭풍설이 여러 캠프에 흩어져 있던 대원들을 엄습했다.
20일까지 전 대원들은 캠프4에 집결해 거기서부터 훈자 포터들의 지원 없이 대원들만의 힘으로 등반을 진행하려고 했다.
캠프4 위 절벽 돌파가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아브루치 능선상의 고도 6,706m 지점에 위치한
대리석 버트레스(바위 기둥) 상의 갈라진 좁은 틈이 바로 ‘하우스 침니’로서
이곳의 경사도는 80도로 맨 몸으로 오르기에도 벅찬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오르려면 더욱 힘들고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침니 상하에 설치한 도르래에 길이 73m의 나일론 로프를 통과시켜 일종의 공중 삭도(索道)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하루 반 만에 408kg의 식량과 장비를 침니 꼭대기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만일 대원들이 침니로 직접 짐을 운반했다면 5일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들은 7월 22일 침니 꼭대기 조금 위쪽에 캠프5(6,706m)를 구축했다.
그날 저녁부터 3일간 폭풍설이 계속되어 대원들은 그 기간에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26일 8명의 전 대원은 짐을 짊어지고 등반을 재개해 7,102m 지점에 두 동의 텐트로 캠프6를 구축하고
크레이그, 벨, 휴스턴 세 명이 그곳에 머무르고 나머지 대원들은 캠프5로 하산했다.
다음 이틀 동안 그들은 혹독한 추위와 강풍과 씨름하며 루트개척을 계속했는데,
핸드홀드가 적은 가파른 암벽에 얼음이나 가루눈이 덮여 있어 등반이 무척 힘들었다.
강풍이 등반 중인 휴스턴 대장의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특수 내복을 두 벌 껴입고
보온 바지와 재킷, 방풍복 바지와 이중 파카를 입고 3중 장갑을 끼고 한국산 방수화를 신고 있었는데도
혹한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블랙 피라미드’ 위쪽에 어렵사리 캠프7(7,559m)을 구축하고,
악천후에 아랑곳하지 않고 릴레이식으로 거기까지 짐을 운반하여 비축해 두었다.
1938년과 1939년 7, 8월에 미국 K2 등반대는 오랫동안 좋은 날씨의 혜택을 누렸고,
모든 사람들은 이 시기를 K2 등반의 최적기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 7월에는 악화일로인 K2의 날씨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30일,
쇼닝과 길키 대원이 캠프7에서 60여m 위쪽 빙벽에 깎아 놓은 좁은 레지로 올라가 비박했다
. 다음날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 아주 가파른 빙벽에 계속해서 스텝 커팅을 하면서 90여m를 더 오르고,
그 위쪽의 경사도가 완만한, 눈 덮인 빙벽의 180여m를 킥스텝으로 힘겹게 오른 후
심설을 헤치고 등반해 넓은 설원 7,772m 지점에 마침내 캠프8를 구축했다.
31일,
흐린 날씨에 찬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날씨가 좋아지면 정상공격을 시도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휴스턴은 세 명의 대원들과 캠프6에서 캠프8로 향했다.
그들은 고소적응이 잘된 상태여서 등반속도가 빨랐다.
캠프7에는 12일치 식량이 비축되어 있어 식량이 떨어질 염려도 없었다.
그들은 침낭, 식량과 연료, 여분의 텐트를 짊어지고,
추락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서로를 확보하며 하루 만에 670여m의 고도를 돌파하고
캠프8에 머물고 있던 쇼닝과 길키 두 대원과 합류했다.
캠프6에 머물고 있던 베이트스와 스트리더 대원도 조만간 그들과 합류하기를 열망했다.
대원들은 캠프8로 더 많은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캠프7에서 전 대원들이 랑데부하기로 무전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캠프6의 두 대원은 올라오지 못했고,
캠프8에 머물고 있던 대원들만 캠프7로 하산해 식량을 운반해 왔다.
그 날 땅거미가 지고 있을 때,
그들이 등로 표시를 위해 15m 간격으로 설사면에 박아놓은 버드나무 막대기들을 따라
베이트스와 스트리더 대원이 몹시 지친 몸으로 캠프8에 도착했다.
이제 앞으로 4일간만 아니 3일간만 좋은 날씨가 지속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K2 정상을 밟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일주일 내내 K2 주변으로 모여들던 먹구름이 드디어 광포한 폭풍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1953년 미국대의 등로.
폭풍설에 갇혀 꼼짝 못 하는 상황에서 길키 대원 정맥염 걸려
8월 1일,
한밤중에 맹렬한 강풍이 그들의 텐트(당시의 군용 A형 텐트)를 강타하며
텐트 자락을 펄럭거리는 소리가 마치 연속되는 기관단총 총성처럼 들려, 그들은 모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이 텐트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하늘에서 마구 쏟아져 내리는 폭설과 설원에 쌓여 있던 심설이 함께 강풍에 휘날리며 사나운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폭풍설이 맹위를 떨치는 동안,
그들은 텐트를 강타하는 강풍의 소음에 시달리며 따뜻한 침낭 속에 누워 강요된 휴식을 취했다.
그들은 여러 번 요리를 하려고,
또는 눈을 녹여 차를 끓이려고 시도했지만,
강풍에 펄럭이는 텐트 천이 스토브의 연약한 불꽃을 번번이 꺼버렸다.
다음 이틀 동안의 시간도 그렇게 폭풍 속에서 무료하게 흘러갔다.
휴스턴 대장은 폭풍이 어서 그치기를 간구했다.
그 때까지 그들은 모두 건강했고, 고소적응도 잘 된 상태였으며,
K2 정상은 바로 그들의 코앞에 있었다.
그들은 태풍의 기세가 수그러들면 곧 정상공격을 감행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비밀 투표를 실시해 1차 공격조로 벨과 크레이그 대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길키와 쇼닝 대원이 2차 공격조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다음주에도 폭풍은 멎지 않았다.
그들의 텐트를 강타하는 강풍은 심술궂고 악의에 찬 것 같았다.
그들은 텐트 천의 펄럭거림을 막아보려고 갖은 수단을 썼지만,
강풍의 위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태풍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면 그들은 재빨리 스토브를 점화하고,
긴장을 풀고 정상을 공략할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전보다 더 강력한 돌풍이 심술궂게 그들의 스토브를 꺼버리면 그들의 계획도 무참하게 날아가 버렸다.
텐트 재봉선의 갈라진 틈바구니로 날아 든 눈가루가 마치 밀가루를 뿌려 놓은 듯 그들의 옷과 침낭을 하얗게 뒤덮었다.
태풍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지 않으면 대소변을 보기 위한 텐트 밖 출입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강풍이 텐트를 세차게 흔들어댈 때,
이 세상의 어떤 질긴 천도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한 기세였다.
가시거리가 15~ 30m에 불과한 백색 지옥 속에서는 강풍과 혹한 외에는 모든 것이 현실에서 격리된 세계였다.
그들은 과일, 캔디, 크래커, 치즈 혹은 건포육을 계속 우물거려 먹었기 때문에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음과 눈의 세계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강풍 때문에 스토브를 작동시킬 수 없어서 음료수를 만들 수 없었고,
그 결과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통조림 잼을 눈과 섞어서 먹어도 오한만 날 뿐,
갈증 해소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갈증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눈 섞은 잼을 몸 속에 품고 체온으로 그것을 녹여
샤베트(찬 과즙 음료)를 만들어 먹으려다 체온만 떨어뜨려 추위의 더 큰 고통을 겪었다.
수분섭취가 부족해서 그들의 피부는 탄력을 잃었고,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초췌하고 야위어 보였다.
휴스턴 대장은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고생에 스포츠라는 명목을 붙이는 것이 타당하기나 할까?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강풍과 추위에 시달리며 걱정과 고난에 찬 삶을 감수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진정으로 자학심리와 차원이 다른,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무방비 상태로 직면한 커다란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원시적인 투쟁에서 강렬한 희열과 만족감을 얻어내려는 것일까?’
사실 그들 여덟 사람은 지상의 모든 도움의 손길이 차단되고 하늘마저 구름으로 닫혀 있는 고립된 상황에서
가장 난폭하고 무시무시한 자연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투쟁에서 삶의 비본질적인 요소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음식, 음료, 은신처, 우정 같은 기본적인 욕구만 남아 있었다.
8월 5일 새벽이 되기 전에 벨과 휴스턴
두 사람은 그들의 텐트의 나일론 천이 찢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둠 속에서 이웃 텐트로 이동하다가는 당장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침낭 속에 누워서 날이 밝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아침 7시가 되자 그들의 텐트는 강풍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막 무너지려고 했다.
그들은 재빨리 옷을 입고 등산화와 장갑을 착용하고 이웃 텐트로 출발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 때 갑자기 텐트 폴이 넘어지며 텐트 천이 그들의 몸을 감쌌다.
그들은 재빨리 무너진 텐트 밖으로 기어나와,
간신히 그들의 침낭을 끄집어내어 이웃 텐트로 피신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은 폭풍이 얼마나 혹독한지 실감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날 아침 그들 앞에 새로운 재앙이 도래했다.
여러 날 동안 길키 대원은 왼쪽 다리에 근육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폭풍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동안 그는 텐트 밖으로 기어나와 일어서려고 시도하다가,
심한 고통으로 인해 기절해 버렸다.
동료들이 그를 텐트 안으로 옮겼다.
휴스턴이 그를 진찰했을 때,
그는 길키의 왼쪽 종아리에서 혈액이 응고되며 혈관이 막혀 정맥염이 발생한 사실을 알아냈다.
휴스턴이 알고 있는 한, 고산등반에서 정맥염이 발생한 사례는 흔치 않았다.
자신들에게 왜 이런 재앙이 발생한 것일까 생각하니 정말 안타까운 심정뿐이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결과는 분명했다.
길키는 걸을 수 없고, 대원들이 그를 산 아래까지 운반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아래쪽 가파른 설사면은 가슴 높이까지 차오르는 가루눈이 쌓여 있는 심설지대였다.
또한 그 아래쪽,
즉 블랙 피라미드까지의 빙사면은 경사가 너무 가팔라 폭설이 죄다 미끄러져 내리고 쌓이지 않는 번쩍거리는 빙벽이었다.
그리고 또 그 아래쪽은 높이가 거의 600m에 달하는 가파른 암벽으로,
군데군데 얼음이 덮여 있어 미끄러운 하산 루트였다.
신설과 얼음이 얼어붙은 이 절벽으로 환자를운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얼굴에 고드름 주렁주렁 매달려 누가 누군지 분간 안 돼
그러나 환자를 혼자 죽어가도록 그곳에 남겨두고,
건강한 대원들만 하산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휴스턴 대장은 환자 수송을 감행하기로 했다.
문제는 전 대원이 전멸할 수도 있는 비극의 방지책이었다.
8,000m 부근에서는 건강한 산악인도 하산이 용이하지 않고,
등산가는 자신의 몸 하나 간수하는 일조차 버거운 일이어서 타인을 돕고 싶어도 도와줄 여력이 없고,
또한 남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는 비정한 세계였다.
사실 죽음의 지대 속의 상황에 평지의 인간 사회 윤리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러나 그들은 동료의 생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대원들은 침낭과 옷가지를 챙기고 길키 대원을 그의 침낭 속에 넣은 후,
그 겉을 폭풍에 찢어진 텐트 천으로 감쌌다.
그들은 나중에라도 등반을 계속하기 위해 캠프의 텐트를 철거하지 않고
길키 대원을 심설 속으로 끌어내리면서 하산을 시작했다.
설사면의 경사가 가팔라지자 위쪽에서 길키 대원을 자일로 끌어 당겨 제동을 걸면서 내려갔다.
그들이 캠프8에서 90m 쯤되는 거리를 하산하고 나서야
전체 설사면이 판상 눈사태의 위험지대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캠프8로 되돌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환자 길키 대원을 가파른 설사면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를 성한 외다리로 일으켜 세운 후, 동료들이 부축하면 다른 대원들이 위쪽에서 자일로 그를 잡아 당겼고,
그는 깡충거리며 외다리로 서서히 걸어서 캠프로 귀환했다.
그들이 90m를 오르는 데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평지에서라면 1, 2주만 지나면 정맥염이 완치될 수 있지만,
그들이 처한 고소 상황에서는 이런 기적을 기대할 수 없었다.
길키를 산밑으로 안전하게 수송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4일 후면 식량도 바닥 날 판인 데다 여러 날 동안
고지대에서 폭풍설 속에 갇혀 수면부족과 갈증으로 허약해진 대원들은
더 이상 캠프8에 머물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들은 날씨가 개일 때까지 기다리며 안전한 하산로를 물색하기로 했다.
쇼닝과 크레이그가 눈사태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설원 좌측의 암릉 옆으로 하산로를 개척하며 내려가 캠프7이 바라보이는 지점까지 루트를 정찰했다.
그들이 환자를 아브루치 스퍼 아래쪽의 높이 6m의 암벽 밑에 위치한 빙벽으로 자일하강시킬 수 있다면,
거기서 폭 140m, 45도 경사의 빙벽을 수평 횡단해 캠프7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돌아왔다.
8월 6일 강풍이 조금 수그러들자
크레이그와 쇼닝은 마지막 정상 도전의 몸짓으로 가시거리 30m인 안개 속에서
캠프8 위쪽의 가파른 설사면으로 90m 더 진출하고 하산해,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9일,
폭풍이 더욱 사나워졌다.
울부짖는 강풍에 날려온 눈가루가 그들의 텐트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들이 텐트 밖으로 나갔다가는 당장 얼어죽을 판이었다.
휴스턴은 최초로 이 무자비한 태풍 속에서 그들이 전멸해 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건강한 대원들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태풍 속에서
환자를 후송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으나, 대원들은 전혀 용기를 잃지 않았다.
길키가 갑자기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휴스턴이 진찰해 보니 그의 맥박 수가 1분에 140이었고,
다리의 혈액 응고가 그의 폐로 옮겨간 상태였다.
휴스턴은 그의 텐트로 자리를 옮기고, 그에게 위안을 주려고 노력했다.
길키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체념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의 사기(士氣)를 고려해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대원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어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대원들이 병세를 물어보면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가 폐색전증에 걸린 데다 성했던 다른 쪽 다리에서도 혈액 응고가 발생했기 때문에,
한시 바삐 그를 하산시켜야 할 위급한 처지가 되었다.
하산 도중에 길키가 절명한다 하더라도 환자를 폭풍 속에서 혼자 죽어가도록 남겨둘 수는 없었다.
강풍이 텐트에 부딪치는 소리가 커다란 망치질 소리 같아서
그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겨우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폭풍설 속에 10일간 갇혀 지낸 그들은 8월 10일 오전 9시경 비상용으로 비박 텐트 한 동을 휴대하고,
나머지 불필요한 장비를 모두 캠프에 남겨두고 하산을 시작했다.
안개가 끼어 가시거리는 30m에 불과했으나 폭설은 그쳤고 강풍도 조금 완화된 상태였다.
그들은 길키의 발이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배낭 속에 넣고 그 위에 침낭을 덮은 다음,
다시 찢어진 텐트로 그 겉을 아기 요람처럼 감싼 다음 자일로 묶었다.
쇼닝-모울나르 조가 앞장서서 안전한 하산로를 물색하고,
크레이그와 벨이 환자의 앞쪽 좌우에서 자일로 끌고, 휴스턴 대장이 환자 바로 뒤에서 후송을 총지휘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제동을 걸 요량으로 스트리더와 베이트스가 맨 뒤에서 환자와 연결된 자일을 잡고,
그들은 가파른 설사면의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며,
무기력한 무게 84kg의 인간 짐을 끌고 280m를 힘차게 내려갔다.
이어서 암릉이 나타나자,
그들은 그 측면의 설사면으로 환자를 천천히 끌어내리는 고된 작업을 계속했다.
설벽의 경사가 매우 가팔라졌다. 다른 우회로는 찾아낼 수 없었다.
강풍과 혹한이 그들이 겹겹이 껴입은 옷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 모두의 발가락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강풍에 날린 눈보라가 그들의 얼굴을 계속 강타해,
눈가루가 녹아서 그들의 콧수염과 턱수염
그리고 눈썹에 얼어붙으며 괴상한 모양의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그들은 누가 누군지 도저히 얼굴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착용한 고글(보안경)에 얼음이 끼어,
그들은 자주 고글을 이마 위로 밀어 올리며, 하산 방향을 잡아야 했다.
환자 길키 대원. / 쇼닝 대원. / 휴스턴 대장
최연소 대원인 쇼닝의 피켈이 동료 다섯 명 목숨 살려내
그들에게 당면한 우선 과제는 환자를 가장 가파른 설벽 아래로 안전하게 하강시키는 일이었다.
강추위에 마비되어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40m 짜리 자일 두 동을 연결해 환자 길키와 연결시킨 후,
휴스턴과 베이트스 두 사람이 폭풍이 몰아치는 암릉에 버티고 앉아서
환자를 확보하며 자일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한편 크레이그 대원이 환자와 함께 자일을 묶고 올바른 하강 방향을 잡아가며 설벽 밑으로 내려갔고,
설벽 위에서 스트리더 대원이 환자의 하강작업을 지켜보며,
크레이그 대원이 보내는 ‘자일 풀어’와 ‘자일 당겨’라는 두 가지 수신호(手信號)를 휴스턴 일행에게 중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확보하던 휴스턴 일행과 환자 길키 사이의 긴 자일이 눈사태를 유발시켜,
엄청난 양의 가루 눈사태가 굉음을 내며 크레이그와 길키를 덮쳐, 두 사람은 눈사태에 휩쓸렸다.
스트리더 대원의 수신호에 따라 휴스턴과 베이트스가 갑자기 자일을 세게 당겼고,
눈사태에 휩쓸려 미끄러져 내리던 크레이그 대원도 설벽에 재빨리 피켈을 단단히 박고 확보해 두 사람은 무사했다.
그들이 그 짧은 피치로 길키를 하산시키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쇼닝과 모울나르 두 대원이 여분의 자일을 마련하기 위해 캠프7에 내려가서
캠프 위쪽의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고정자일을 회수해 운반했다.
크레이그 대원은 가루 눈사태와 사투를 벌이다가 혼쭐이 나고
또한 몹시 지쳐서 혼자 빙벽을 횡단해 캠프7 부근의 작은 레지에 자신을 확보하고,
자신의 파카 속에 파고든 가루눈을 털어 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6m 높이의 암벽 위쪽에서 쇼닝이 둥근 바위 뒤쪽 심설에 피켈을 깊이 박고 거기에 자일을 감아 환자를 확보했고,
대원들은 힘을 합해 환자 길키를 암벽 아래쪽의 빙벽까지 18m를 하강시켰다.
그들은 그곳에서 빙벽의 여러 군데에 확보물을 설치하고
환자를 펜듈럼으로 캠프7까지 수평 이동시킬 준비작업을 진행하려고 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모울나르 대원이 환자와 연결된 긴 자일에 몸을 묶고 혼자 빙벽을 거의 횡단했다.
빙벽의 18m 위쪽에서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잘 걷지 못하는 벨 대원이
스트리더와 자일을 묶고 환자의 이동을 돕기 위해 단단하게 얼어 붙은 위험한 빙벽 구간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그들의 아래쪽에서 베이트스와 자일을 묶은 휴스턴이 빙벽에 확보물을 설치하기 위해
환자와 수평거리 12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그때 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벌어졌다.
벨 대원이 발을 헛디뎌 갑자기 빙벽으로 추락하면서 그를 확보하고 있던 스트리더 대원을 끌어 내렸다.
스트리더가 아이스 액스를 빙벽에 박아 제동을 걸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였고,
그들 두 사람의 자일이 휴스턴과 베이트스 조의 자일과 얽히며 네 사람이 빙벽으로 함께 추락했다.
추락하던 베이트스가 재빨리 빙벽에 아이스 액스를 박았지만,
강력한 충격이 그를 확보지점에서 끌어 내렸다.
그는 점점 가속이 붙어 추락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직감했다.
네 사람은 이제 환자와 모울나르 대원 사이의 자일과 얽혀 다섯 명이 함께 추락했다.
그런데 갑자기 추락이 기적처럼 멎었다.
확보기술이 아주 뛰어난 최연소 대원 쇼닝이
절벽 위의 눈 속에 깊이 박힌 피켈에 휘감은 자일에 보디 빌레이(Body Belay) 기법을 구사하며,
혼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환자 길키와 5명의 대원들의 추락을 저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그가 확보하고 있던 나일론 자일이 고무줄처럼 늘어났지만 다행스럽게 절단되지는 않았다.
5명이 추락을 멈춘 지점은 아브루치 능선 상의 블랙 피라미드 위쪽의 절벽 가장자리였다.
베이트스 대원은 60m쯤 추락해 자일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그의 몸을 덮치고 있던 모울나르 대원이 신음소리를 냈는데,
많은 양의 코피가 그의 콧수염과 턱수염을 적시고 있었다.
그들의 위쪽에는 자일에 얽혀 꼼짝 못하는 스트리더 대원이 있었다.
18m 아래쪽에는 벨 대원이 쓰러져 있었고,
벨 대원의 조금 위쪽 설벽에는 휴스턴 대장이 누워 있었다.
스트리더 대원이 먼저 자일에서 빠져나와 베이트스의 얽힌 자일을 풀어주고 두 사람이 휴스턴 쪽으로 내려갔는데,
휴스턴은 뇌진탕 초기 증세로 의식 불명 상태였다.
벨 대원은 추락 과정에서 양쪽 장갑과 배낭을 잃어버려,
그의 손이 마비되고 흰색으로 변해 동상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베이트스가 재빨리 자신의 여벌 장갑을 그에게 주었다.
빙벽을 가로지르는 눈보라 때문에 시계(視界)가 흐렸다.
휴스턴이 깨어나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베이트스가 앞장서고 휴스턴은 스트리더와 크레이그의 부축을 받으며 아이스 레지의 캠프7로 올라갔다.
스트리더와 크레이그는 환자 길키에게 건너가 그를 안심시키고,
크레이그가 빙벽에 아이스 액스를 깊이 박아 자일로 환자 길키를 확보시켰고,
스트리더도 아이스 액스를 박고 환자를 다시 확보시켰다.
암벽 위쪽에서 자일로 확보하고 있던 쇼닝 대원도
절벽을 내려와 환자 옆 빙벽에 아이스 액스를 박고 자일로 환자를 세 번째로 확보시켰다.
3명의 대원들은 환자를 그렇게 단단히 확보시킨 후 혼자 남겨두고,
캠프7으로 건너가 텐트 설치작업을 도왔다.
그들은 45분간 좁은 레지의 얼음을 깎아내고 텐트를 설치하는 작업을 완료했다.
스트리더, 베이트스, 크레이그가 환자 길키를 운반하려고
가파른 빙벽을 건너서 환자가 확보되어 있는 장소에 갔을 때는 길키가 종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들이 부상자 휴스턴 대장과 벨 대원을 이동시키고,
텐트 한 동을 추가로 설치하는 동안 또 한 차례의 눈사태가 아트 길키를 휩쓸어 내렸던 것이다.
그를 확보했던 세 개의 아이스 액스마저 눈에 띄지 않았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들은 4명이 한 텐트,
3명이 다른 텐트에 들어,
동료를 잃은 슬픔과 그들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비극 발생 40년 지난 1993년 아트 길키의 유해 일부 발견
다음날 아침 잔뜩 흐린 날씨 속에
그들은 밤새 가벼운 뇌진탕 증세를 보였던 휴스턴과 함께 하산을 시작했는데,
절벽 밑에서 올려치는 눈보라가 그들의 얼굴을 끊임없이 강타해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암벽의 아주 작은 레지까지도 가루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어서 블랙 피라미드 구간을 하산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대원들이 역경 속에서도 사기를 잃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강한 팀 스피리트를 유감 없이 발휘하며 단 한 번의 추락도 없이 8시간 만에 캠프6에 도달했다.
텐트 천 조각들, 부러진 아이스 액스, 로프 동강이 등,
길키가 추락하면서 남겨놓은 비극의 흔적들이 눈에 띄어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캠프6의 한 텐트는 눈이 가득 들어 차 있었고,
다른 텐트는 눈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지옥에서 생환한 그들에게는 그곳이 천국과 다름없었다.
빙벽에서 추락시에 벨 대원과 휴스턴은 침낭을 분실했기 때문에
베이트스가 휴스턴과 벨 대원이 모울나르와 침낭을 나누어 덮었다.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쑤셔댔지만 그들은 극도로 지친 상태라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 폭풍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들은 텐트 속에 누워 오랜 기간 동안 시달렸던 갈증을 해소하려고 끊임없이 눈을 녹여 음료수를 만들어 마셔댔다.
벨 대원의 발에 걸린 동상이 악화되고 있었고,
모울나르와 크레이그 대원도 발꿈치에 동상이 걸렸다.
오후에 폐렴증세에서 약간 회복된 쇼닝과 스트리더가 3명의 부상자들을 이끌고 캠프5로 먼저 하산했다.
나머지 휴스턴 일행은 다음날 8월 12일 아침에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로가 아주 험난해졌다.
그들은 오후 3시에 캠프5에 도착해 스트리더와 모울나르 대원이 마련해 준 뜨거운 차를 마시고 하산을 계속했다.
어둠 속에서 진행한, 캠프5와 캠프4 사이의 하우스 침니 하산이 가장 힘들었다.
캠프4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캠프2까지 내려왔다.
다음날 날씨가 맑아졌다.
그들은 베이스캠프로 귀환해 악몽 같은 고통에서 벗어났다.
혼자서 놀라운 솜씨로 확보해 5명의 추락을 막은 쇼닝 대원은 K2에서 영웅이 되어 귀국했고,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산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비극이 발생한 지 40년이 지난 1993년에 K2의 베이스캠프 상부 빙하에서
아트 길키의 유해 일부가 옷 조각과 함께 발견되어, 미국의 유족에게 인계되었다.
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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